2015년 2월 9일 월요일
결혼으로 만든 제국, 합스부르크
근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은 어디일까?
전성기인 16세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신성로마제국, 이탈리아 북부 및 남부, 저지대 국가(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왕가였으며 20세기가 시작하던 무렵까지도 오스트리아의 황실이었던 이 왕가에 필적할 만한 존재는 프랑스의 카페가문(카페왕조에서 발르와 왕조를 거쳐 부르봉 왕조에 이르는 이 가문역시 만만치 않은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 스페인 왕실이 부르봉 왕가이므로 따지고 보면 아직까지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정도가 있을 뿐이다.
합스부르크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작위도 당연히 휘황찬란하다.
합스부르크 백작, 독일 왕, 로마 왕, 신성로마황제, 오스트리아 공작, 헝가리 왕, 카스티야와 레온 왕, 아라곤 왕, 에스파냐 왕, 바르셀로나 백작, 부르고뉴 대공작, 나폴리 왕, 시칠리아 왕, 사르데냐 왕, 파르마 공작, 오스트리아 대공작, 포르투갈 왕, 플랑드르 백작,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왕, 달마티아 왕, 토스카나 대공작, 모데나 공작, 오스트리아 황제, 독일연방 수장...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거대한 제국이 사실은 별다른 정복전쟁도 없이 건설되었다는 점이다. 오직 정략결혼만으로 이토록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군주들에게 결혼이 얼마나 효과적인 정치적 수단인지를 보여주는 이 놀라운 통합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작위도 당연히 휘황찬란하다.
합스부르크 백작, 독일 왕, 로마 왕, 신성로마황제, 오스트리아 공작, 헝가리 왕, 카스티야와 레온 왕, 아라곤 왕, 에스파냐 왕, 바르셀로나 백작, 부르고뉴 대공작, 나폴리 왕, 시칠리아 왕, 사르데냐 왕, 파르마 공작, 오스트리아 대공작, 포르투갈 왕, 플랑드르 백작,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왕, 달마티아 왕, 토스카나 대공작, 모데나 공작, 오스트리아 황제, 독일연방 수장...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거대한 제국이 사실은 별다른 정복전쟁도 없이 건설되었다는 점이다. 오직 정략결혼만으로 이토록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군주들에게 결혼이 얼마나 효과적인 정치적 수단인지를 보여주는 이 놀라운 통합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 되었다.
우선 스페인에 아라곤 왕가가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동부를 차지하고 있던 아라곤왕가는 결혼을 통해 바르셀로나 후작령과 통합하였고 시칠리아와 나폴리에서 앙주왕가가 쫓겨난 틈을 타 이곳에 진출하였다. 최종적으로 15세기말 페르난도의 시대가 되면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후작령, 발렌시아 왕국, 마요르카 왕국, 시칠리아 왕국, 몰타, 나폴리 왕국, 사르데냐 왕국의 군주를 겸하게 되었다.
다음은 카스티야 왕국. 스페인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던 카스티야 왕국은 중세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다. 15세기 말에는 이사벨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왕이 결혼함으로서 두 왕국은 하나로 결합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 스페인 왕국의 탄생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한사람의 상속자만이 태어났다. 바로 후아나 공주다. 따라서 통일 스페인 왕국은 향후 후아나 공주에게 상속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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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라나다왕국의 항복을 받는 페르난도와 이사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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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시밀리안 황제 |
세 번째는 오스트리아였다. 15세기말 오스트리아의 왕이었던 막시밀리안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겸하고 있었으며 보헤미아라고 불리던 현재 체코의 군주이기도 했다. 그가 속한 가문이 바로 합스부르크가였다. 그는 유력한 여자 상속자와의 결혼을 통한 세력 확장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가 표적으로 삼은 상속자는 마리아 데 부르고뉴였다.
마리아 데 부르고뉴의 나라는 부르고뉴 공국이다.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포함한 영역을 다스리던 이 공국도 15세기말에는 오직 한사람의 상속자인 마리아 데 부르고뉴에게 상속될 처지였다. 이 마리아 데 부르고뉴에게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이 청혼을 한 것이다. 결혼이 성립되면 당연히 두 사람의 자식에게 두 왕국이 상속될 예정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했고 아들을 하나 낳았다. 이름은 필리프 혹은 펠리페. 미남왕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미남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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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남왕 필리페와 후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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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과 후아나의 아들 카를 5세 |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렇게 다양하게 구성된 제국을 결합할 만한 관용정신을 가지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제국을 단일한 이념으로 통일하고자 했다. 어쩌면 너무 이질적인 존재들을 결혼이라는 틀로 묶어 놓았기 때문에 더더욱 이념적 통일성에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왕실의 믿음이 곧 신민들의 믿음이 되길 원했던 왕실의 바람은 오히려 제국을 파국으로 몰아 넣는다. 사상 탄압에 맞서 각지에서 반란이 속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라진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체위에 진정한 근대가 시작된다.
2015년 1월 15일 목요일
밥 모제스에 대한 기억.... 자유는 영원한 투쟁(freedom is a constant struggle)
@ 기억에 남는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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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모제스 |
밥 모제스. 벌써 인터뷰를 한지 1년이 넘었다.
아마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의 살아있는 전설중 한사람이다.
'미시시피 버닝'이라는 영화로 알려진 '미시시피 프리덤 섬머'의 기획자이자 책임자였다.
생각보다 많이 늙으셨지만 눈빛은~
1964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밥 모제스가 이끌던 미시시피 비폭력학생위원회는 북부의 백인 대학생들이 미시시피지역에서 흑인과 함께 활동하며 흑인들의 투표등록을 돕도록 하는 "프리덤 섬머"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남부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지역이었던 미시시피의 인종주의자들은 이들이 공산주의자들이며, 소련의 간첩이고, 문란한 백인 여학생들을 앞세워 무지한 흑인들을 유혹해서 평화로운 미시시피를 정복하려 한다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실제 세사람이 경찰관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미시시피 버닝'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평소 리버럴한 성향을 보이던 백인학생들의 부모들도 정작 자식들이 흑인과 함께 운동하기 위해 떠난다고 하자 의절을 선언하거나 학비를 중단하는등 참가를 극력 막았다.
하지만 전국에서 3,000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세사람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실이 알려진후...
출발에 앞서 밥 모제스가 학생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상황을 설명한 후 말을 이어갔다.
"..... 누구든지 지금 이 자리에서 돌아가도 됩니다.
처음에 출발할때 여러분은 죽을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고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지금 돌아간다고 비겁한게 아닙니다. 상황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다시 결정해야합니다.
.....하지만....
제발 저와함께 가주십시요.
그곳은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슨일이 있어도 여러분과 함께 있겠다는 것 뿐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자유는 영원한 투쟁(freedom is a constant struggle)"이라는 흑인영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합창으로 바뀌었고 다음날 아침 그들은 미시시피로 떠났다.
2015년 1월 13일 화요일
앤드류 램버트 인터뷰 "21세기의 초강대국은?"
이 인터뷰는 제가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세계적인 군사학자중 한사람인 영국의 앤드류 램버트교수와 인터뷰한 내용중 일부입니다. 다큐멘타리에서도 쓰지 못했고, 책에도 쓰지 못했지만 그냥 사장시키기엔 아까운 내용들이라 이곳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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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드류 램버트 (영국 킹스 컬리지 교수) |
질문 : 초강대국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초강대국은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한 개 이상의 대륙에서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나라죠.
두 개의 작전지역 사이의 해상 통신(sea communication/커뮤니케이션)을 통제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19세기에는 오직 하나의 초강대국이 있었습니다. 바로 영국입니다.
이것은 힘이 아닙니다.
전 세계를 운영하는 능력입니다.
영국은 힘이 센 적이 없습니다. 뛰어난 군대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를 점령했던 마지막 영국인은 1422년에 사망했습니다. (헨리 5세를 가리킴)
영국은 이런 군사적 능력을 갖춘 적이 없습니다.
초강대국이 되기 위해 자신의 해상력을 솜씨 있게 발휘했습니다.
미국은 20세기 초강대국입니다.
미국은 다릅니다. 엄청난 자원을 가진 대륙 국가입니다.
인구도 많고 돈도 많습니다. 산업도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사용할 의지도 가득합니다.
미국은 어디든 가고 그 누구도 못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리아에 폭탄을 터뜨릴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이 원한다면 알아서 할거니까요
우리가 국방에 돈을 쓸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영국이든 한국이든 말이죠.
자신의 국방력이 엄청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미국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초강대국은 너무 강력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지금은 중국이 미국에 도전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대답은 그렇지 않다 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기술적으로...
단순히 두 나라는 수준이 다릅니다.
중국은 강한 플레이어입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은 매우 강력합니다.
대서양에서 중국의 세력은 어떻습니다.
북극에서는요?
지중해에서는요?
유럽에서는요?
아니면 북이나 남아메리카에서는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국은 초강대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계적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매우 강력하지만, 중국은 지역적 플레이어입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두 번의 세계대전 동안 일본은 아주 강력했습니다.
아시에에서 대단한 위세를 떨쳤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을 넘지는 못했습니다.
중국은 일본의 옛 모습보다 더 크고 강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족쇄를 부수지 못했습니다. 세계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소비에트 연방은 아메리카 대륙까지 손을 뻗칠 수 있었습니다.
쿠바에 동맹이 있었습니다.
국제적인 규모의 운영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가까스로 그럴 수 있었죠.
중국은 아직 거기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훨씬 더 위험한 미국의 경쟁자였습니다.
중국은 아직 아니지만 앞으로 그렇게 될 수도 있죠.
하지만 중국은 지역에서 아주 강력합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오해가 전쟁을 일으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면 중국의 민주적 개혁보다 미국과의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대륙 국가는 국내 사정에 민감합니다.
중국의 문제는 미국이 아닙니다. 바로 중국 사람들이죠.
스스로를 기득권층(power establishment/지배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한족이 아니거나, 공산당 당원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아주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중국에 뜻밖의 커다란 경제적 이익이 생긴다면
중국은 이를 외국이 아닌 본토에 사용할 겁니다.
저는 여전히 미국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하는데 많은 돈을 쓰려고 준비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미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국인들에게 다른 모든 사람으로부터 다른 모든 사람을 보호하는 데 돈을 쓰고 싶으냐고 물어보세요.
원치 않습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시리아 공격을 원치 않습니다. 그저 고국에 가고자 합니다.
자기들이 사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베이징에 갔을 때 중국인들과 이에 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는 미국과 중국이 가진 문제는 두 나라가 똑같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크고, 아주 강하며, 자신에게 집착하죠.
내가 얼마나 크고 강한지 좀 보라구! 네, 안다구요.
영국은 그렇지 않죠.
알다시피 영국은 아주 작습니다.
작은 나라는 영리하거나 아니면 쥐죽은 듯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영국은 계속 불만을 토로합니다. 저는 영국이 꽤 영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나라는 장점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큰 나라는 그럴 필요가 없죠.
미국과 중국은 아주 크고 강합니다.
하지만 두 나라가 전쟁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질문 : 그렇다면 21세기에는 어느나라가 초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할까요?
미국이죠.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입니다.
아마 앞으로 50년간 중국은 이를 따라잡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중국은 미국이 가진 세계를 움직이는 능력이 없습니다.
미국 같은 전략 무기 시스템도 없습니다.
중국의 모든 군대는 완전히 구식입니다.
중국군은 민간 방위 조직으로 국내 폭동을 통제합니다.
전투에 나가는 군대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중국 바깥에서 전쟁을 치른 나라는 어디입니까?
베트남입니다.
한 방 먹었죠.
베트남은 중국을 쫓아냈습니다.
베트남도 성공적으로 침략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미국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미군은 중국을 완전히 압도할 겁니다.
남중국해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해군은 큰 손실을 입을 겁니다.
일본이 대부분을 침몰시킬 테니까요.
미국이 도착해서는 중국인 선원들을 구조하고 있을 겁니다.
어떤 전투도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공군은 더 심각합니다.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2015년 1월 6일 화요일
중국이 언제쯤 미국을 추월할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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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미셸 바나나 |
그럼 왜 우리는 그렇게 맛있었다는 그로미셸 바나나를 먹지 못하게 된 것일까? 그로미셸 바나나는 말 그대로 순종이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먹어봐서 알지만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씨가 없다. 그러니 서로 다른 나무의 유전자가 섞여서 씨앗을 만드는 과정이 존재할 수 없다. 일종의 꺾꽂이 방식으로 또 다른 바나나 나무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유전적으로 모두 쌍둥이인 것이다. 말 그대로 완벽한 순종인 셈이다. 완벽한 순종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유전적으로 모두 동일한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염병에 치명적이다. 유전적으로 서로 다르면 A라는 전염병에 어떤 개체는 죽더라도 어떤 개체는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 유전적으로 동일성이 높기 때문에 모든 개체가 한꺼번에 몰살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전 세계의 모든 바나나 농장에 있던 바나나 나무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SF영화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사라진 그로미셸 바나나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캐번디시 바나나이다. 물론 캐번디시도 그로미셸과 같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완전한 순종이고 전염병에 치명적이다. 그렇다면 10년쯤 뒤에 우리는 캐번디시 보다 당도가 떨어지는 세번째 종의 바나나를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역사이야기를 하다가 난데 없이 바나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순종과 잡종, 순혈주의와 다원주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기 때문이다. 순종이라는게 꼭 생물학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으로도 존재한다. 흔히 문화적 DNA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는가? 생물학적으로는 DNA가 고정되어 버린 것이 순종이다. 순종이 변화하는 환경에 매우 허약한 것 처럼 문화적으로도 폐쇄적인 순혈주의는 환경변화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자신들에게 익숙하고,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양한 생각이 끼여들 여지가 없기 때문에 쉽게 극단주의로 빠진다. ‘다른 생각’이라는 이름의 제어장치가 없는 자동차인 셈이다. 그래서 급속도로 몰락한 제국들은 순혈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20세기초 우리를 강점했던 일본제국이나 나치의 제3제국은 순혈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한때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던 스페인도 순혈주의에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하버드 대학의 조지프 나이 교수를 인터뷰하다가 들은 이야기가 있다. 한 국제 회의에 참석했던 나이 교수는 평소 친분이 있던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수상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중국이 언제쯤 미국을 추월할 것 같습니까?”
알다시피 싱가포르라는 나라는 중국계 화교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도시국가이다. 당연히 리콴유 전수상도 중국계 화교이다. 그런데 리콴유의 답변은 조금 의외였다. 그는 중국은 미국을 추월할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중국의 인적자원은 13억이지만 미국의 인적자원은 70억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미국의 실제 인구는 3억 정도 된다. 그러니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날카로운 통찰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자. 만약 당신이 지금 미국이나 중국으로 성공의 기회를 찾아 이민을 간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당신이 이민을 갔을 때 어느 나라에서 당신이 - 외국인이 아니라 - 그 나라의 완전한 시민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겠는가? 당신이나 당신의 자식이 그 나라에서 공직에 진출할 확률이 어느 나라가 더 높겠는가? 아마 따져볼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시리아 출신 아버지를 둔 스티브 잡스와 케냐 출신 아버지를 둔 오바마, 헝가리 이민자 출신의 조지 소로스가 공존하는 미국은 그 다원성만으로도 전 세계의 인재를 끌어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럼 중국은 영원히 미국을 앞설 수 없는 걸까?
꼭 그렇기야 하겠는가.
물론 중국이 다민족 국가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 처럼 워낙 오랜 기간 한족 국가로 살아왔기 때문에 타민족을 받아들이는게 쉬울 리 없다. 더군다나 이미 인구가 너무 많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이 다민족 국가가 되지 않더라도 미국이 순혈주의화 할 수는 있다. 미국이 제풀에 무너지는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가 워낙 이민자의 나라인지라 쉬울 것 같지는 않지만 요즘 티파티들의 기세를 보면 꼭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민자들이 뒤섞인 상태에서 순수성을 부르짓는게 참 어이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16세기 스페인도 원래부터 순수한 스페인인들이 있어서 순수한 스페인의 혈통을 부르짖은 게 아니다. 순수성이란 그냥 발명하면 그만인 존재이므로 미국도 나름의 순수성이란 걸 발명해낼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린 성큼 다가온 중국 패권시대를 맞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꼭 그렇기야 하겠는가.
물론 중국이 다민족 국가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 처럼 워낙 오랜 기간 한족 국가로 살아왔기 때문에 타민족을 받아들이는게 쉬울 리 없다. 더군다나 이미 인구가 너무 많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이 다민족 국가가 되지 않더라도 미국이 순혈주의화 할 수는 있다. 미국이 제풀에 무너지는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가 워낙 이민자의 나라인지라 쉬울 것 같지는 않지만 요즘 티파티들의 기세를 보면 꼭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민자들이 뒤섞인 상태에서 순수성을 부르짓는게 참 어이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16세기 스페인도 원래부터 순수한 스페인인들이 있어서 순수한 스페인의 혈통을 부르짖은 게 아니다. 순수성이란 그냥 발명하면 그만인 존재이므로 미국도 나름의 순수성이란 걸 발명해낼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린 성큼 다가온 중국 패권시대를 맞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내눈으로 그런 세상을 보고 싶지는 않다. (중국 패권시대가 싫다는게 아니라 미국이 폐쇄적인 국가가 되는 순간을 보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2015년 1월 2일 금요일
오스만의 대포 - 불가능한 혁신
한때 '절대강자'로 군림하다가 끌려 내려온 인간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낡은 것에 집착하다가 시대에 뒤처졌다는 점이다.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이나 IBM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교훈은? "새로운 것에 항상 열린 마음을 가지고 혁신을 받아들이자"???
하지만 불행히도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열린 마음이나 혁신적 자세라는게 그런 걸 가지고 싶다고해서 그냥 생기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때 힘 좀 쓰던 '강자'들은 버려야할 낡은 유산이라는 것이 자신의 존재가치 그 자체와 연결되거나 최소한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실은 혁신이라는게 거의 불가능한 이유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첫번째 예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이다. 맘루크라는 단어는 원래 노예를 뜻하는 말이었다. 다만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아니고 군사노예 그러니까 군주에게만 충성하는 노예군단을 뜻한다. 따라서 노예라고는 해도 이들은 엘리트 군인이었다. 특히 기마에 능한 캅차크계통의 투르크인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완전무장하고 전장을 누비는 중장 기병이었다. 전쟁터에서의 모습만 보면 중세 유럽의 기사단과 유사한 느낌일 것이다. 이 노예들-혹은 기병집단이 이집트의 아유브 왕조를 대체하고 직접 권력을 잡은 것이 맘루크왕조다.13세기 중반부터 시작되는 이집트 맘루크왕조의 명성은 1260년 아인 잘루트에서 몽골 기마군단을 격파하고 1291년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를 함락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의 패권을 쥐고 250년간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그 영광을 뒷받침 한 것이 맘루크 왕조의 중장 기병들이다. 최고의 돌파력을 자랑하며 전장을 누비던 이들에게는 몽골군단도, 티무르 제국도 쉽게 손을 댈 수 없었다.
문제는 1516년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이집트 공략을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오스만, 페르시아와 함께 이슬람 세계를 3분하고 있던 맘루크인 만큼 호락호락하게 당할 생각은 없었다. 곧 오스만 군단을 요격하기 위해 맘루크가 자랑하는 기병대가 출격했다. 하지만 이 둘이 맞붙은 마지-다비크 전투는 허망할 정도로 싱겁게 끝났다. 맘루크가 자랑하던 중장기병은 이미 화약시대로 접어든 16세기에 그들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군대인가를 드러내며 몰살당했다. 오스만 제국은 일찍부터 유럽인들에게서 화약무기의 사용법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대포와 총 등 화약무기를 성공적으로 실전에서 사용하고 있었지만 맘루크들은 이미 화약시대로 접어든 16세기 임에도 중세 기사들처럼 활과 창으로 무장한 채 정면돌격만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총과 대포에 정면으로 맞선 맘루크 기병대의 용기는 가상한 것이었지만 용기만으로 화약 무기를 이길 수는 없었다.
맘루크들이 실패한 이유도 결국 혁신의 부재였던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 버리면 '역시 혁신이 중요하다'라는 식의 정말 뻔한 교훈으로 끝나고 만다. 문제는 왜 맘루크들은 오스만 군대와 달리 화약무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어리석어서? 문화적으로 보수적이라서? 하지만 이런 이유는 사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맘루크들에게 화약무기 세례를 안긴 오스만 제국도 이집트 맘루크 왕조와 똑같은 투르크계 이슬람교도들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오히려 맘루크들의 사회적 지위, 그러니까 기득권 자체가 이들이 엘리트 기병이라는 사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집트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엘리트 기병으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력에 있었다. 그러니 이걸 포기해버리면 맘루크들은 더 이상 엘리트가 아니다. 만약 이집트 군대에 화약무기를 받아들이고 이들을 주력으로 쓰게 된다면 맘루크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맘루크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적군의 화약무기에 쓰러질지언정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이집트 군대에는 결코 화약무기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카이사르의 말처럼 인간은 자신이 보고싶은 현실만을 바라보기 마련인지라 그렇게 해도 당분간은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은 법이라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느라 화약무기의 도입을 저지한 댓가는 곧바로 전쟁터에서 치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듬해인 1517년 맘루크 왕조는 멸망한다.
그럼 화약 무기 도입에 성공한 오스만은 그후에서 승승장구했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같은 화약 무기라도 어떤 화약무기인가라는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제 오스만과 화약무기 사이의 악연을 살펴보기 위해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으로 가보도록 하자.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주인이었던 비잔틴 제국은 비록 과거에 비해 형편없이 쇠락하여 콘스탄티노플 부근을 겨우 영유하고 있을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성벽만은 유럽 전체를 통틀어도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견고했다.
그러니 교훈은? "새로운 것에 항상 열린 마음을 가지고 혁신을 받아들이자"???
하지만 불행히도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열린 마음이나 혁신적 자세라는게 그런 걸 가지고 싶다고해서 그냥 생기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때 힘 좀 쓰던 '강자'들은 버려야할 낡은 유산이라는 것이 자신의 존재가치 그 자체와 연결되거나 최소한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실은 혁신이라는게 거의 불가능한 이유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첫번째 예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이다. 맘루크라는 단어는 원래 노예를 뜻하는 말이었다. 다만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아니고 군사노예 그러니까 군주에게만 충성하는 노예군단을 뜻한다. 따라서 노예라고는 해도 이들은 엘리트 군인이었다. 특히 기마에 능한 캅차크계통의 투르크인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완전무장하고 전장을 누비는 중장 기병이었다. 전쟁터에서의 모습만 보면 중세 유럽의 기사단과 유사한 느낌일 것이다. 이 노예들-혹은 기병집단이 이집트의 아유브 왕조를 대체하고 직접 권력을 잡은 것이 맘루크왕조다.13세기 중반부터 시작되는 이집트 맘루크왕조의 명성은 1260년 아인 잘루트에서 몽골 기마군단을 격파하고 1291년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를 함락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의 패권을 쥐고 250년간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그 영광을 뒷받침 한 것이 맘루크 왕조의 중장 기병들이다. 최고의 돌파력을 자랑하며 전장을 누비던 이들에게는 몽골군단도, 티무르 제국도 쉽게 손을 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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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맘루크 기병. 전형적인 중장기병임을 알 수 있다. |
맘루크들이 실패한 이유도 결국 혁신의 부재였던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 버리면 '역시 혁신이 중요하다'라는 식의 정말 뻔한 교훈으로 끝나고 만다. 문제는 왜 맘루크들은 오스만 군대와 달리 화약무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어리석어서? 문화적으로 보수적이라서? 하지만 이런 이유는 사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맘루크들에게 화약무기 세례를 안긴 오스만 제국도 이집트 맘루크 왕조와 똑같은 투르크계 이슬람교도들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오히려 맘루크들의 사회적 지위, 그러니까 기득권 자체가 이들이 엘리트 기병이라는 사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집트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엘리트 기병으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력에 있었다. 그러니 이걸 포기해버리면 맘루크들은 더 이상 엘리트가 아니다. 만약 이집트 군대에 화약무기를 받아들이고 이들을 주력으로 쓰게 된다면 맘루크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맘루크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적군의 화약무기에 쓰러질지언정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이집트 군대에는 결코 화약무기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카이사르의 말처럼 인간은 자신이 보고싶은 현실만을 바라보기 마련인지라 그렇게 해도 당분간은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은 법이라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느라 화약무기의 도입을 저지한 댓가는 곧바로 전쟁터에서 치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듬해인 1517년 맘루크 왕조는 멸망한다.
그럼 화약 무기 도입에 성공한 오스만은 그후에서 승승장구했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같은 화약 무기라도 어떤 화약무기인가라는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제 오스만과 화약무기 사이의 악연을 살펴보기 위해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으로 가보도록 하자.
| 콘스탄티노플 3중성벽 |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주인이었던 비잔틴 제국은 비록 과거에 비해 형편없이 쇠락하여 콘스탄티노플 부근을 겨우 영유하고 있을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성벽만은 유럽 전체를 통틀어도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견고했다.
로마제국 말기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건설된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플 삼중 성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성벽 앞에는 유럽의 어느 성벽보다 깊고 넓은 해자가 있었고 해자 뒤에는 흉벽과 너비가 2m 높이가 5m인 외성벽, 너비 5m 높이 12m인 내성벽 줄줄이 자리잡고 있었다. 흉벽과 외성벽, 내성벽을 포함해서 삼중 성벽이라고 불린다. 더구나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 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감시하고 적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외성벽과 해자는 이제 흔적을 찾기가 거의 어렵지만 폭이 5m나 되는 내성벽은 아직도 세월의 공격을 견뎌내고 이스탄불 시내 곳곳에 남아있다. 성벽의 위력은 말 그대로 막강해서 제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수도 면전까지 영토가 유린되었다 해도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 역시 압도적인 병력으로도 쉽사리 성벽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반대로 해석하면 일단 성벽만 넘어선다면 수적으로도 압도적일 뿐만 아니라 정예함에서도 당시 유럽에서 상대가 없었던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가 순식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로지 견고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돌파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는 셈이었다.
이렇게 성벽으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오스만 진영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역사는 이 사람의 이름을 우르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헝가리 출신이라고 추정되는 우르반은 원래 비잔틴 황제에게 먼저 달려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대포를 만들 수 있으니 이 기술을 사달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비잔틴 황제는 왠일인지 그를 물리쳤다. 그러자 이 대포 기술자는 자신의 기술을 사줄 사람을 찾아 오스만 진영으로 넘어온 것이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진위여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극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가공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가공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비잔틴 황제는 우르반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비잔틴 입장에서는 이 대포가 아무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15세기까지 대포는 전적으로 성벽을 부수는 데만 사용되었다. 그러니 성벽을 부수는 게 아니라 지키는 게 목적인 비잔틴 제국의 입장에서 이 대포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비잔틴의 황제가 좀 더 냉혹한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그를 죽여서 기술 자체를 말살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는 입장이 달랐다. 그가 애타게 찾고 있던 것이 바로 성벽을 부수는 무기였기 때문이다. 메메드는 즉시 우르반에게 요구하는 금액의 2배를 주고 대포를 만들도록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포는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정식으로는 ‘마호메타’라는 이름을 부여받았고 ‘불 뿜는 도마뱀’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이 대포는 포신의 길이만 8.2m, 무게는 19톤이 넘었다. 포탄으로는 돌덩어리를 사용했는데 500㎏ 이상의 돌덩어리를 깎아 만든 포탄을 최소 1.6㎞ 이상 발사했다고 한다. 워낙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기 때문에 대포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사륜마차 30대와 소 60마리 그리고 무려 200명의 병사가 필요했다. 포가 한번 터지면 거대한 굉음 때문에 19km 떨어진 임산부가 유산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메메드 2세는 만족했다. 곧 비슷한 크기의 대포들이 차례로 제작되어 성벽을 파괴하는데 동원되었다. 동원된 대포들은 부분적으로 너무 큰 크기 때문에 몇발 쏘지도 못하고 부서지곤 했지만 대부분은 성공적으로 성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특히 대포가 발사될 때마다 발생하는 엄청난 폭음은 콘스탄티노플 방위군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버텨내지 못했고 1453년 5월 29일에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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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탄불 군사박물관에 전시된 오스만 시대의 대포 |
한 동안은 이 거대한 대포들이 효과를 발휘했고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다. 대포의 발달과 함께 성벽도 변하기 시작했다. 돌이나 벽돌이 아닌 흙이 요새 축성의 주요 재료로 사용되자 성벽을 부수는 대포의 위력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야전에서 이렇게 크기만 한 대포는 점점 쓸모가 없어졌다. 시대의 흐름은 오히려 야전에 쉽게 끌고 다닐 수 있는 소규모 야전포가 중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은 대포의 크기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이 거대한 대포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야포의 우위가 명백해진 18세기 말에도 오스만 제국은 거대한 대포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와 전쟁 중이던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 되었던 토트 남작은 “넓은 구경 때문에 겉보기에는 막강해 보이지만 막상 첫발을 발사하면 한참 지나야 작동 시킬 수 밖 에 없어 두려워 할 까닭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대포가 어느 정도로 시대착오적인 괴물이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조금 길지만 토트 남작의 기록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투르크인들은 보스포러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성곽위에 500Kg 짜리 돌덩어리를 날려 보낼 수 있는 엄청난 대포를 올려 놓았다. 무라드 치세 당시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대포는 나사못으로 연결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파샤에게 공격 시 한발 이상 발사할 경우 재장전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처음 단 한발 만으로도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므로 한발의 발사만으로도 적 함대를 날려버리는데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시험발사를 제안했다. 그러지 내 제안에 주위사람들은 벌벌 떨었고 그 가운데 가장 늙은 사람은 이 대포가 아직까지 발사된 적이 없으나 만약 발사되면 이 성곽과 도시 전체를 뒤덮을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 온다고 주장했다.
대포를 장전하기 위해 화약이 자그마치 150Kg이나 소모되었다. 나는 수석 기술자에게 뇌관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내 명령을 듣자 모두들 다가올 위험을 겁내며 자취를 감추었다. 파샤도 꽁무니를 빼려는 참이었지만 나는 성 한 모퉁이 작은 정자에서는 포탄의 효과를 안전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며 간신히 그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파샤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자 이제 남은 일은 기술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 뿐이었다. 그는 도망가지 않고 남은 유일한 기술자였지만 이런저런 불평만을 늘어놓으며 확고한 결의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를 북돋기 보다는 나도 그와 똑같은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그가 군소리를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대포 뒷쪽 보루에 자리 잡았고 땅이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550m 떨어진 거리에서 바윗덩어리가 세 조각으로 쪼개지더니 한 조각이 해협너머에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반대편 산등성이로 도로 튕겨 나오는 것이 보였다.”
결국 맘루크 기병들을 화약 무기로 끝장냈던 오스만 제국도 콘스탄티노플의 승리에 자만함으로써 시대에 뒤떨어진 대포에 집착하게 되었고 17세기를 기점으로 유럽인들에게 군사적 우위를 내주게 된 것이다.
그러니 개혁이니 혁신이니 하는 말이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인양 떠들지 말자. 스티브 잡스의 표현처럼 혁신이란 스스로를 잡아먹을(자신의 기득권을 내가 먼저 공격할)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개혁이니 혁신이니 하는 말이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인양 떠들지 말자. 스티브 잡스의 표현처럼 혁신이란 스스로를 잡아먹을(자신의 기득권을 내가 먼저 공격할)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잡아먹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잡아먹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다.”
- 스티브 잡스
2014년 12월 31일 수요일
무장한 예언자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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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외벽에 있는 마키아벨리 동상 |
"새로운 형태의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고 위험하며 성공하기 힘든 일은 없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구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리던 모든 사람들이 개혁자에게 적대적이 되는 반면, 새로운 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리게 될 사람들은 기껏해야 미온적인 지지자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미온적인 지지만 받는 이유는 잠재적 수혜자들이 한편으로 과거에 법을 일방적으로 전횡하던 적들을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회의적인 속성상 자신들의 눈으로 확고한 결과를 직접 보기 전에는 새로운 제도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변화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혁신자를 공격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전력을 다하여 공격하는 데에 반해서, 그 지지자들은 오직 반신반의하며 행동할 뿐입니다. 따라서 개혁적인 군주와 미온적인 지지자들은 큰 위험에 처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철저하게 검토하기 위해서, 우리는 개혁자들이 자신의 힘으로만 행동하는지 아니면 타인에게 의존하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성공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간청할 필요가 있는지 아니면 능히 자신의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 그들은 거의 항상 성공하지 못하며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여 개혁을 주도할 만한 충분한 힘이 있으면, 그들은 거의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무장한 예언자는 모두 성공한 반면,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실패했습니다.
만약 모세, 키로스, 테세우스 그리고 로물루스가 무력이 없었더라면, 각자 자신이 만든 새로운 정치질서를 오랫동안 보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시대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신부는 그에 대한 다중의 믿음을 상실하자마자 그가 세운 새로운 질서와 더불어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를 믿지 않았던 자들에게 믿게끔 할 뿐만 아니라 그를 믿었던 자들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언급한 그처럼 유능한 개혁자들은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모든 위험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시작한 후에 다가오며, 그 위험들은 자신들의 역량을 통해서만 극복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위험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성공을 시기하는 자들을 섬멸함으로써 존경을 받게 되면, 그들은 강력하고 확고하며 존중받는 성공한 지도자로 남아 있게 됩니다."
- 마키아벨리 '군주론' 중에서
2014년 12월 30일 화요일
최치원, 고선지, 흑치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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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 |
최치원, 고선지, 흑치상지 이 세사람이 공통점은 뭘까?
각각 신라, 고구려, 백제 출신으로 당나라에 가서 높은 벼슬에 오르고 성공했다는 것이다. 머나먼 이국 땅에까지 가서 성공했기에 우리는 이들을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입증한 사례로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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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노 나카마로 |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나라때 중국에 가서 성공한 선조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나라와 비교적 교류가 적었던 일본에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라는 사람이다. 그는 일본에서 당나라로 유학해서 공부했는데 학문이 뛰어나 당나라 현종의 황자와도 교분이 두터웠고 당나라 문인들과도 폭넓게 교제했다. 한 일화에 의하면 그가 오랜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려고 했을 때 배가 난파되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당나라의 대시인 이백이 ‘아베를 곡한다’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아마 이백과도 상당한 교분이 있었던 듯하다. 다행히 아베는 살아남아 당나라로 귀환하여 '조형(晁衡)'이라는 이름으로 당 조정에서 '비서감(秘書監)'이라는 고위벼슬에 오르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의 장관까지 지냈다. 물론 일본인들도 이 사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나라와 일본만이 아니다. 토번(지금의 티벳)이나 거란, 돌궐, 심지어 중앙아시아나 이란에도 당나라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있다. 이쯤 되면 정말 대단한 것은 신라가 아니라 당나라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다양한 출신지를 가진 인재들이 모두 당나라를 위해 일했으니 말이다.
남의 나라에 가서 성공한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신화는 요즘도 사그러 들줄 모른다. 미국에서 세계은행 총재로 취임한 김용 총재도 한때 대단한 화제가 되었고, 올랑드 대통령이 임명한 프랑스의 플뢰르 펠르랭(한국명 김종숙) 중소기업 디지털 장관도 남의 나라에서 성공한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DNA로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이 두 케이스에서 정말 대단한 것이 우리 민족일까? 그 우수한 인재들이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 가를 생각해보면 대답은 자명하다. 정말 대단한 것은 사실 그 우수한 인재들을 자기 나라에서 성공하게 만든 미국과 프랑스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 영국에서, 미국에서 출세한 우리민족에 대한 자랑은 조금 자제해보자. 오히려 언젠가 우리가 한국에서 성공한 이주자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때가 온다면 그때가 아마 '대한민국'의 국격을 자랑할 수 있는 순간일 것이다.
1936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글은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사IN"에 기고했던 글이다. 2년이 지난 지금 읽어보니 야권이 지금도 그때 그 상태 그대로라는 사실에 다소 절망적인 느낌이 든다.
“당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먼저 당선되어야 한다” - 프랭클린 D 루즈벨트
2012년 대선이 시작되면서 몇몇 후보들이 루즈벨트를 롤모델로 제시했습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양극화, 고삐풀린 독점기업들의 횡포, 공동체정신의 실종 등 1930년대 대공황 때를 연상시키는 현재의 한국상황이 아마도 ‘루즈벨트 같은’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불러온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대통령 선거의 진행상황을 보면, 후보들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루즈벨트가 했던일에 대해서만 공부를 했지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루즈벨트가 했던 일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루즈벨트의 말처럼 선거에서 이기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적습니다. 루즈벨트는 이상주의적 성향이 풍부한 정치가이기도 하지만 권력을 잡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선거에 이기기 위해 정말 악착같이 싸웠습니다.
루즈벨트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난 1936년 대선은 20세기 미국의 운명을 결정한 선거였습니다. 당시 상황을 간략히 살펴볼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최저임금제, 사회보장제도, 농업보조금제등 주요 뉴딜법안은 1935년 연방 대법원에 의해 모두 위헌판결을 받았습니다. 듀퐁같은 거대 기업은 루즈벨트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80% 이상의 언론은 루즈벨트를 적대시 했습니다. 1936년 대선에서 루즈벨트가 패배했다면 뉴딜정책도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루즈벨트는 반드시 이겨야만 했습니다.
<1935년 사회보장법안에 서명하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기기 위해서 루즈벨트가 선택한 방법은 공공의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고 그들과 맹렬하게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에서 루즈벨트는 특권적인 독점기업들에 대해 “경제적 왕당파”라고 부르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 “왕당파”라는 호칭은 영국국왕과 싸워서 독립을 쟁취한 미국인들의 당시 정서를 고려할때 한국식으로 바꾸면 “친일파”정도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과연 한국의 대통령 후보들이 경제적 특권세력을 “경제적 친일파”정도의 강한 단어로 공격할 수 있을까요? 루즈벨트의 공격을 받은 거대기업들은 당연히 루즈벨트를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사회주의자, 파시스트, 독재자 등등 할수있는 모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오히려 루즈벨트의 입장을 강화시키고 당선을 도와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공공의 ‘적’을 분명히 하는 것은 선거자체뿐 아니라 선거후에도 도움을 줍니다. 논쟁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선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미국인들은 투표를 통해 루즈벨트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표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1936년 경제적 특권세력과 공공연한 전쟁을 선포한 루즈벨트가 승리하자 미국에서 뉴딜은 사회적 합의가 되었습니다. 뉴딜에 대한 비난은 사라졌고 1935년에 위헌 판결을 내린 거의 동일한 법안에 대해 연방대법원은 다시 합헌판결을 내립니다.
선거는, 특히 대통령 선거는 국가의 진로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입니다. 뉴딜정책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루즈벨트가 1936년에 낙선했다면 뉴딜도 끝났을 것이고 미국은 전혀 다른길을 걸어갔을 것입니다. 우리사회를 바꾸고 싶다면 자신과 신념을 공유하는 후보자를 당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시사IN 2012년 12월 17일 (월) [274호]
몽골제국의 이방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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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제국의 영역 |
1241년. 유럽은 몽골군의 침공으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러시아와 폴란드가 순식간에 정복되었고 중세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강국이었던 헝가리군도 모히전투에서 몰살당했다. 결국 몽골군에 저항할만한 나라라고는 중부유럽에선 오스트리아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오스트리아 마저 넘어간다면 이제 파리가 몽골군의 말발굽아래 놓일 차례였다. 실제로 겨울이 되자 몽골군의 정찰대가 다뉴브 강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빈의 수비대도 정찰을 강화하고 몽골군의 침입을 대비했다. 그러던 어느날. 다뉴브 강변을 순찰하던 빈의 순찰대는 소규모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몽골군 장교 한사람을 생포했다. 그런데 장교를 심문하기 위해 끌고가던 빈의 군대는 장교의 정체를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가 영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영어뿐 아니라 아랍어와 몽골어까지 할 줄 알았다고 한다. 빈의 군대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당황했다. 분명히 지옥에서온 괴물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들과 같은 유럽인이 끼어 있다니.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나면 그 상황자체를 지워버림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할 때가 있다.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빈의 군대는 심문조차 하지 않고 영국인 장교를 처형했다. 결국 그가 어떻게 몽골군에 가담하게 되었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고 말았다.
유럽인이 몽골군에 가담했다고 하니까 이 영국인이 정말 특이한 존재인 것 같지만 이 영국인 장교의 예는 결코 특별한 예외는 아니다. 무식한 야만인 집단일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몽골군은 사실 몽골인만으로 구성된 군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몽골군은 그들이 정복한 지역 어디에서나 새로운 동맹자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시켰다. 순수한 몽골인만의 집단이 아니라 무수한 이방인이 원래의 몽골인에 결합한 집단이 몽골군의 실체였던 것이다. 내친김에 13세기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몽골군의 구성을 살펴보도록 하자.
가장 중요한 주력군은 물론 몽골초원의 경기병들이다. 몽골초원의 유목민으로 태어나 걷기도 전에 말을 타기 시작하는 이들은 말그대로 타고난 기병이다. 당연히 기마술이 뛰어나고 말위에서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다. 더군다나 최소한의 보급만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능력 덕분에 보급부대가 거의 필요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자신들이 끌고 다니는 말의 젖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했다고 한다. 몽골군이 아무런 보급부대도 없이 세상 끝까지 원정에 나설 수 있었던 데는 이들의 놀라운 기동력과 생존능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거의 약점이 없는 무적의 군대일 것 같지만 이들도 약점은 있다. 이들이 경기병이라는 사실 자체가 바로 약점이다. 경기병이라는 단어가 알려주는 것처럼 이들은 거의 갑옷을 걸치지 않는다. 안에는 비단옷을 입고 바깥에는 가죽을 덧댄 매우 가벼운 갑옷을 걸쳤다. 기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가볍게 입고, 가벼운 장비만을 걸치는 것이다. 그래야 말도 지치지 않고 빠르게 달릴 수 있다. 하지만 갑옷을 거의 걸치지 않으면 방어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견고한 방어벽을 이루고 있는 보병의 밀집부대를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은 이들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가능한 정면 충돌을 회피했다. 대신에 활을 이용했는데 몽골군은 관통력 높은 매우 강력한 활을 가지고 있어서 정면 공격을 회피하는 그들의 약점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약점을 감출 수 있는 전술도 개발해냈다. 그들이 사냥터에서 항상 사용하는 방식을 전쟁터로 끌어들인 전술이었다. 우선 사냥터에서 짐승을 몰듯이 적군을 몰아 원형으로 둘러싼다. 몽골군은 적에 비해 월등한 기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군은 사냥원진을 활용한 몽골군의 포위망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곤 엄청난 숫자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몽골의 활은 우리나라의 각궁처럼 복합재질로 되어있는 작고 가볍지만 강력한 활이었다. 따라서 사거리가 매우 길고 관통력이 높았다. 따라서 이정도 공격만으로도 상당한 살상효과가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이러한 몽골군의 전술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출전하는 타타르(몽골)병사는 각자 60개의 화살을 휴대할 의무가 있다. 그 가운데 30개는 짧은 화살인데 이것은 적을 움직이기 못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나머지 30개는 긴 화살로 화살촉도 큰데 이것은 근접 거리에서 적병의 얼굴 및 팔을 관통하거나 적병의 활시위를 절단하거나 그 외의 곳에 직접 손상을 가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이 60개의 화살을 모두 써버리면 그들은 칼이나 철퇴, 창을 휘둘러 서로 치는 백병전에 돌입한다... 화살을 다 쏴 버리자 병사들은 각자 활을 화살 통에 넣고 칼과 철퇴를 들고 적에게 돌격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효율적으로 공격해도 결국은 정면공격과 백병전으로 승부를 내야할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몽골의 정복범위가 넓어지고 다양한 전투방식을 가진 적들을 만나게 됨에 따라 정면공격의 필요성도 커져갔다. 몽골군의 전통적인 방식만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순간에 몽골인들의 개방성과 유연성이 빛을 발했다. 몽골인들은 자신이 잘 할 수 없는 분야에서는 꺼리낌 없이 자신이 정복한 이방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자신들만의 전통적인 방식에 집착하거나 자기들끼리의 힘만으로 해결하는 것은 몽골인들의 사고방식과 가장 거리가 먼 방식이었다. 우선 코카서스 산맥의 알란족처럼 전통적인 중기병들을 적극 활용했다. 따라서 몽골군이 백병전 공격을 원할 때는 몽골인이 나서지 않고 여진족, 킵차크 투르크족, 알란족, 러시아인인 루스족(Rus)이 전투에 나섰다. 이민족 출신의 중기병들이 몽골군의 최대 약점을 커버해준 셈이다.
이민족 출신의 중기병들을 몽골군에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이점이 있었다. 아무래도 원거리에서 화살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전술에 비해 중기병들의 정면 돌격은 아군의 희생도 클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상대방이 유럽의 기사들 처럼 철갑으로 중무장한 상태일 경우 피해는 더 커졌다. 이런 희생이 큰 정면 돌격에 이민족출신 중기병이 참여함에 따라 핵심전력인 몽골군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총병력이 10만 남짓에 불과한 군대로 전세계를 상대해야하는 몽골군으로서는 전투로 인한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런 유목민 위주의 군단에 정주민 사회 출신의 군대가 더해졌다. 물론 보병은 아니었다. 몽골군은 기동성을 매우 중시해서 기병으로만 원정군을 구성했기 때문에 보병이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었다. 대신 기술자들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공병대가 큰 활약을 했다. 이 이민족 출신 공병대야말로 몽골군이 가진 기술력의 핵심이었다.
몽골군이 공병대의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칭기즈칸이 북중국에 자리한 서하를 공격하면서 부터였다. 초창기 성공격에 애를 먹던 칭기즈칸은 중국인 기술자들이 멀리서 거대한 돌덩어리로 성벽을 부술 수 있는 공성무기를 만들 줄 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전통적으로 유목민족은 자신의 힘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성곽에 강렬한 적개심을 드러내곤 했다. 그 성곽을 무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칭기즈칸은 공성무기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칭기즈칸은 이 무기들을 자신의 군대에 곧바로 도입했다. 무기만 도입한 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만들 줄 아는 기술자를 끌어들이는 것을 더 중요시 했다. 재미있는 것은 몽골군은 항상 무기 그 자체 보다 무기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근대적인 인권 개념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실용적이었기 때문이다. 전세계를 상대로 전투를 했던 몽골군의 원정거리는 수천Km를 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렇게 먼 거리를 원정하는데 만약 무거운 공성무기 같은 것을 끌고 다녔다면 아마 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제풀에 지치고 말았을 것이다. 몽골군은 공성무기를 끌고 다니는 대신 기술자들을 높은 대우를 해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적의 요새에 도착하면 즉석에서 기술자들이 주변의 목재나 석재등을 활용한 공성무기를 만들어 공격에 착수했다. 적의 요새나 성을 목책을 이용해서 통채로 감싸는 토목공사도 물론 이런 기술자들이 나서서 순식간에 해치웠다. 군대 자체가 일종의 토목공사 전문가 집단이었던 로마군을 제외한다면 이 정도의 토목공사를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던 군대는 아마 몽골군이 유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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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드다드 공방전 |
포위공격에서도 중국인 공병대의 활약은 눈부셨다. 몽골군은 공성무기를 끌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공병 부대는 바그다드 부근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즉석에서 공성무기를 만들어야 했다. 우선 키가 큰 야자나무들이 베어져서 초대형 투석기의 재료가 되었다. 이어서 바그다드를 벽으로 둘러싸는 공사가 벌였다. 그런데 바그다드 부근은 숲이 부족해서 목책을 쌓을 만한 나무들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병부대는 곧 대안을 찾아냈다. 깊은 도랑을 파고 그 흙으로 벽을 만들어서 바그다드를 둘러싼 것이다. 누벽이 완성되자 곧 초대형 투석기들이 거대한 돌덩이와 불덩어리들을 날리기 시작했다. 결국 바그다드 시민들의 저항의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몽골군이 바그다드에 대한 포위작전을 시작한 게 1월 29일이었는데 2월 3일에는 이미 성벽이 파괴되고 몽골군이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서남아시아 최대의 도시인 바그다드조차 한달을 버틸 수 없었다.
이렇게 몽골군단은 결코 순수한 몽골인들만의 집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몽골인들만의 순수성을 고집했다면 초원에서 일어나 잠깐 빛을 발하고는 사라져갔던 무수한 유목민들의 길을 답습했을 것이다. 하지만 몽골인들은 이방인을 받아들이는데 꺼리낌이 없었고 그랬기에 역사상 가장 넓은 진정한 세계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관용이야말로 몽골제국이 가진 진정한 힘의 원천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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