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일 금요일

오스만의 대포 - 불가능한 혁신

  한때 '절대강자'로 군림하다가 끌려 내려온 인간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낡은 것에 집착하다가 시대에 뒤처졌다는 점이다.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이나 IBM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교훈은? "새로운 것에 항상 열린 마음을 가지고 혁신을 받아들이자"???

  하지만 불행히도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열린 마음이나 혁신적 자세라는게 그런 걸 가지고 싶다고해서 그냥 생기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때 힘 좀 쓰던 '강자'들은 버려야할 낡은 유산이라는 것이 자신의 존재가치 그 자체와 연결되거나 최소한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실은 혁신이라는게 거의 불가능한 이유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첫번째 예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이다. 맘루크라는 단어는 원래 노예를 뜻하는 말이었다. 다만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아니고 군사노예 그러니까 군주에게만 충성하는 노예군단을 뜻한다. 따라서 노예라고는 해도 이들은 엘리트 군인이었다. 특히 기마에 능한 캅차크계통의 투르크인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완전무장하고 전장을 누비는 중장 기병이었다. 전쟁터에서의 모습만 보면 중세 유럽의 기사단과 유사한 느낌일 것이다. 이 노예들-혹은 기병집단이 이집트의 아유브 왕조를 대체하고 직접 권력을 잡은 것이 맘루크왕조다.13세기 중반부터 시작되는 이집트 맘루크왕조의 명성은 1260 아인 잘루트에서 몽골 기마군단을 격파하고 1291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를 함락했을 절정에 달했다.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의 패권을 쥐고 250년간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그 영광을 뒷받침 한 것이 맘루크 왕조의 중장 기병들이다. 최고의 돌파력을 자랑하며 전장을 누비던 이들에게는 몽골군단도, 티무르 제국도 쉽게 손을 댈 수 없었다. 
맘루크 기병. 전형적인 중장기병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1516년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이집트 공략을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오스만, 페르시아와 함께 이슬람 세계를 3분하고 있던 맘루크인 만큼 호락호락하게 당할 생각은 없었다. 곧 오스만 군단을 요격하기 위해 맘루크가 자랑하는 기병대가 출격했다. 하지만 이 둘이 맞붙은 마지-다비크 전투는 허망할 정도로 싱겁게 끝났다. 맘루크가 자랑하던 중장기병은 이미 화약시대로 접어든 16세기에 그들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군대인가를 드러내며 몰살당했다. 오스만 제국은 일찍부터 유럽인들에게서 화약무기의 사용법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대포와 총 등 화약무기를 성공적으로 실전에서 사용하고 있었지만 맘루크들은 이미 화약시대로 접어든 16세기 임에도 중세 기사들처럼 활과 창으로 무장한 채 정면돌격만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총과 대포에 정면으로 맞선 맘루크 기병대의 용기는 가상한 것이었지만 용기만으로 화약 무기를 이길 수는 없었다. 
  맘루크들이 실패한 이유도 결국 혁신의 부재였던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 버리면 '역시 혁신이 중요하다'라는 식의 정말 뻔한 교훈으로 끝나고 만다. 문제는 왜 맘루크들은 오스만 군대와 달리 화약무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어리석어서? 문화적으로 보수적이라서? 하지만 이런 이유는 사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맘루크들에게 화약무기 세례를 안긴 오스만 제국도 이집트 맘루크 왕조와 똑같은 투르크계 이슬람교도들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오히려 맘루크들의 사회적 지위, 그러니까 기득권 자체가 이들이 엘리트 기병이라는 사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집트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엘리트 기병으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력에 있었다. 그러니 이걸 포기해버리면 맘루크들은 더 이상 엘리트가 아니다. 만약 이집트 군대에 화약무기를 받아들이고 이들을 주력으로 쓰게 된다면 맘루크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맘루크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적군의 화약무기에 쓰러질지언정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이집트 군대에는 결코 화약무기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카이사르의 말처럼 인간은 자신이 보고싶은 현실만을 바라보기 마련인지라 그렇게 해도 당분간은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은 법이라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느라 화약무기의 도입을 저지한 댓가는 곧바로 전쟁터에서 치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듬해인 1517년 맘루크 왕조는 멸망한다.
  그럼 화약 무기 도입에 성공한 오스만은 그후에서 승승장구했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같은 화약 무기라도 어떤 화약무기인가라는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제 오스만과 화약무기 사이의 악연을 살펴보기 위해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으로 가보도록 하자. 


콘스탄티노플 3중성벽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주인이었던 비잔틴 제국은 비록 과거에 비해 형편없이 쇠락하여 콘스탄티노플 부근을 겨우 영유하고 있을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성벽만은 유럽 전체를 통틀어도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견고했다. 
  로마제국 말기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건설된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플 삼중 성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성벽 앞에는 유럽의 어느 성벽보다 깊고 넓은 해자가 있었고 해자 뒤에는 흉벽과 너비가 2m 높이가 5m인 외성벽, 너비 5m 높이 12m인 내성벽 줄줄이 자리잡고 있었다. 흉벽과 외성벽, 내성벽을 포함해서 삼중 성벽이라고 불린다. 더구나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 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감시하고 적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외성벽과 해자는 이제 흔적을 찾기가 거의 어렵지만 폭이 5m나 되는 내성벽은 아직도 세월의 공격을 견뎌내고 이스탄불 시내 곳곳에 남아있다. 성벽의 위력은 말 그대로 막강해서 제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수도 면전까지 영토가 유린되었다 해도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 역시 압도적인 병력으로도 쉽사리 성벽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반대로 해석하면 일단 성벽만 넘어선다면 수적으로도 압도적일 뿐만 아니라 정예함에서도 당시 유럽에서 상대가 없었던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가 순식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로지 견고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돌파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는 셈이었다. 
  이렇게 성벽으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오스만 진영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역사는 이 사람의 이름을 우르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헝가리 출신이라고 추정되는 우르반은 원래 비잔틴 황제에게 먼저 달려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대포를 만들 수 있으니 이 기술을 사달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비잔틴 황제는 왠일인지 그를 물리쳤다. 그러자 이 대포 기술자는 자신의 기술을 사줄 사람을 찾아 오스만 진영으로 넘어온 것이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진위여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극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가공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가공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비잔틴 황제는 우르반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비잔틴 입장에서는 이 대포가 아무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15세기까지 대포는 전적으로 성벽을 부수는 데만 사용되었다. 그러니 성벽을 부수는 게 아니라 지키는 게 목적인 비잔틴 제국의 입장에서 이 대포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비잔틴의 황제가 좀 더 냉혹한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그를 죽여서 기술 자체를 말살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는 입장이 달랐다. 그가 애타게 찾고 있던 것이 바로 성벽을 부수는 무기였기 때문이다. 메메드는 즉시 우르반에게 요구하는 금액의 2배를 주고 대포를 만들도록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포는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정식으로는 ‘마호메타’라는 이름을 부여받았고  ‘불 뿜는 도마뱀’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이 대포는 포신의 길이만 8.2m, 무게는 19톤이 넘었다. 포탄으로는 돌덩어리를 사용했는데 500㎏ 이상의 돌덩어리를 깎아 만든 포탄을 최소 1.6㎞ 이상 발사했다고 한다. 워낙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기 때문에 대포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사륜마차 30대와 소 60마리 그리고 무려 200명의 병사가 필요했다. 포가 한번 터지면 거대한 굉음 때문에 19km 떨어진 임산부가 유산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메메드 2세는 만족했다. 곧 비슷한 크기의 대포들이 차례로 제작되어 성벽을 파괴하는데 동원되었다. 동원된 대포들은 부분적으로 너무 큰 크기 때문에 몇발 쏘지도 못하고 부서지곤 했지만 대부분은 성공적으로 성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특히 대포가 발사될 때마다 발생하는 엄청난 폭음은 콘스탄티노플 방위군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버텨내지 못했고 1453년 5월 29일에 함락되었다.
이스탄불 군사박물관에 전시된 오스만 시대의 대포
  이때부터 오스만 제국은 대포의 크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나톨리아를 비롯한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서는 양질의 청동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곧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포들이 앞 다투어 만들어지고 공성전에 사용되었다. 대포들이 너무 커서 전쟁터에 끌고 다니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오스만의 술탄들은 아예 전쟁터에다가 대포 제조공장을 세우고 그곳에서 직접 초대형 대포를 만들곤 했다. 이것도 풍부한 청동자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이스탄불에 있는 군사박물관에 가보면 정말 거짓말처럼 엄청난 크기의 청동 대포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구경할 수 있다. 너무 커서 직접 보면 솔직히 무섭다기 보다는 웃음이 나올 정도다. 
  한 동안은 이 거대한 대포들이 효과를 발휘했고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다. 대포의 발달과 함께 성벽도 변하기 시작했다. 돌이나 벽돌이 아닌 흙이 요새 축성의 주요 재료로 사용되자 성벽을 부수는 대포의 위력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야전에서 이렇게 크기만 한 대포는 점점 쓸모가 없어졌다. 시대의 흐름은 오히려 야전에 쉽게 끌고 다닐 수 있는 소규모 야전포가 중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은 대포의 크기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이 거대한 대포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야포의 우위가 명백해진 18세기 말에도 오스만 제국은 거대한 대포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와 전쟁 중이던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 되었던 토트 남작은 “넓은 구경 때문에 겉보기에는 막강해 보이지만 막상 첫발을 발사하면 한참 지나야 작동 시킬 수 밖 에 없어 두려워 할 까닭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대포가 어느 정도로 시대착오적인 괴물이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조금 길지만 토트 남작의 기록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투르크인들은 보스포러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성곽위에 500Kg 짜리 돌덩어리를 날려 보낼 수 있는 엄청난 대포를 올려  놓았다. 무라드 치세 당시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대포는 나사못으로 연결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파샤에게 공격 시 한발 이상 발사할 경우 재장전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처음 단 한발 만으로도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므로 한발의 발사만으로도 적 함대를 날려버리는데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시험발사를 제안했다. 그러지 내 제안에 주위사람들은 벌벌 떨었고 그 가운데 가장 늙은 사람은 이 대포가 아직까지 발사된 적이 없으나 만약 발사되면 이 성곽과 도시 전체를 뒤덮을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 온다고 주장했다.
대포를 장전하기 위해 화약이 자그마치 150Kg이나 소모되었다. 나는 수석 기술자에게 뇌관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내 명령을 듣자 모두들 다가올 위험을 겁내며 자취를 감추었다. 파샤도 꽁무니를 빼려는 참이었지만 나는 성 한 모퉁이 작은 정자에서는 포탄의 효과를 안전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며 간신히 그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파샤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자 이제 남은 일은 기술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 뿐이었다. 그는 도망가지 않고 남은 유일한 기술자였지만 이런저런 불평만을 늘어놓으며 확고한 결의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를 북돋기 보다는 나도 그와 똑같은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그가 군소리를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대포 뒷쪽 보루에 자리 잡았고 땅이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550m 떨어진 거리에서 바윗덩어리가 세 조각으로 쪼개지더니 한 조각이 해협너머에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반대편 산등성이로 도로 튕겨 나오는 것이 보였다.”
  결국 맘루크 기병들을 화약 무기로 끝장냈던 오스만 제국도 콘스탄티노플의 승리에 자만함으로써 시대에 뒤떨어진 대포에 집착하게 되었고 17세기를 기점으로 유럽인들에게 군사적 우위를 내주게 된 것이다. 
  그러니 개혁이니 혁신이니 하는 말이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인양 떠들지 말자. 스티브 잡스의 표현처럼 혁신이란 스스로를 잡아먹을(자신의 기득권을 내가 먼저 공격할)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잡아먹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다.” 
- 스티브 잡스

댓글 1개:

  1. 안녕하세요 이주희 PD님~ 저는 KBS 역사저널 그날의 강민정 작가(010-5343-7122)입니다. 저희가 이번에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공성전을 다룬 방송을 준비하고 있는데, PD님께서 게시물에 올리신 우르반 대포 이미지를 사용하고 싶어 문의드립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방송 인서트 자료로 해당 이미지를 사용해도 괜찮을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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