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9일 월요일

결혼으로 만든 제국, 합스부르크

근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은 어디일까? 
아마 재론할 필요도 없이 합스부르크 왕가일 것이다.
합스부르크의 문장

전성기인 16세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신성로마제국, 이탈리아 북부 및 남부, 저지대 국가(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왕가였으며 20세기가 시작하던 무렵까지도 오스트리아의 황실이었던 이 왕가에 필적할 만한 존재는 프랑스의 카페가문(카페왕조에서 발르와 왕조를 거쳐 부르봉 왕조에 이르는 이 가문역시 만만치 않은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 스페인 왕실이 부르봉 왕가이므로 따지고 보면 아직까지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정도가 있을 뿐이다. 
합스부르크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작위도 당연히 휘황찬란하다.
합스부르크 백작, 독일 왕, 로마 왕, 신성로마황제, 오스트리아 공작, 헝가리 왕, 카스티야와 레온 왕, 아라곤 왕, 에스파냐 왕, 바르셀로나 백작, 부르고뉴 대공작, 나폴리 왕, 시칠리아 왕, 사르데냐 왕, 파르마 공작, 오스트리아 대공작, 포르투갈 왕, 플랑드르 백작,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왕, 달마티아 왕, 토스카나 대공작, 모데나 공작, 오스트리아 황제, 독일연방 수장...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거대한 제국이 사실은 별다른 정복전쟁도 없이 건설되었다는 점이다. 오직 정략결혼만으로 이토록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군주들에게 결혼이 얼마나 효과적인 정치적 수단인지를 보여주는 이 놀라운 통합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 되었다.

우선 스페인에 아라곤 왕가가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동부를 차지하고 있던 아라곤왕가는 결혼을 통해 바르셀로나 후작령과 통합하였고 시칠리아와 나폴리에서 앙주왕가가 쫓겨난 틈을 타 이곳에 진출하였다. 최종적으로 15세기말 페르난도의 시대가 되면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후작령, 발렌시아 왕국, 마요르카 왕국, 시칠리아 왕국, 몰타, 나폴리 왕국, 사르데냐 왕국의 군주를 겸하게 되었다. 

다음은 카스티야 왕국. 스페인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던 카스티야 왕국은 중세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다. 15세기 말에는 이사벨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왕이 결혼함으로서 두 왕국은 하나로 결합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 스페인 왕국의 탄생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한사람의 상속자만이 태어났다. 바로 후아나 공주다. 따라서 통일 스페인 왕국은 향후 후아나 공주에게 상속될 예정이었다.

그라나다왕국의 항복을 받는 페르난도와 이사벨

막시밀리안 황제

세 번째는 오스트리아였다. 15세기말 오스트리아의 왕이었던 막시밀리안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겸하고 있었으며 보헤미아라고 불리던 현재 체코의 군주이기도 했다. 그가 속한 가문이 바로 합스부르크가였다. 그는 유력한 여자 상속자와의 결혼을 통한 세력 확장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가 표적으로 삼은 상속자는 마리아 데 부르고뉴였다. 
마리아 데 부르고뉴의 나라는 부르고뉴 공국이다.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포함한 영역을 다스리던 이 공국도 15세기말에는 오직 한사람의 상속자인 마리아 데 부르고뉴에게 상속될 처지였다. 이 마리아 데 부르고뉴에게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이 청혼을 한 것이다. 결혼이 성립되면 당연히 두 사람의 자식에게 두 왕국이 상속될 예정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했고 아들을 하나 낳았다. 이름은 필리프 혹은 펠리페. 미남왕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미남이었다고 한다.


미남왕 필리페와 후아나

필립과 후아나의 아들 카를 5세
이쯤 설명했으면 독자들도 눈치 챘겠지만 이제 스페인왕국의 후아나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페가 결혼할 차례이다. 1495년 둘은 결혼 했다. 실제로 펠리페와 후아나가 직접 만난건 결혼식 전날인데, 둘은 서로를 처음 보자 반했으며 성직자들에게 결혼식을 최대한 빠른 시일로 잡아주길 부탁하였고, 결국 다음 날 둘의 결혼식이 열렸다고 한다. 한동안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고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을 상속자도 낳았다. 하지만 남편 펠리페가 1506년에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남편이 요절하자 남편을 정말 미치도록 사랑했던 후아나는 정신이상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상속자 카를 5세(스페인 국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에게 모든 상속권이 돌아갔다. 결국 16세기 유럽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자 카를 5세는 오직 결혼을 통해서만 이베리아반도와 이탈리아 남부 및 북부 일부, 벨기에와 네덜란드 및 프랑스와 독일의 일부지역,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체코로 구성된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은 것이다. 여기에 그 자신도 정략결혼으로 영토 확장에 기여했다. 포르투갈 마누엘 1세의 딸이었던 이사벨과 결혼하여 펠리페 2세를 낳은 것이다. 결국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까지 물려받게 된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렇게 다양하게 구성된 제국을 결합할 만한 관용정신을 가지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제국을 단일한 이념으로 통일하고자 했다. 어쩌면 너무 이질적인 존재들을 결혼이라는 틀로 묶어 놓았기 때문에 더더욱 이념적 통일성에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왕실의 믿음이 곧 신민들의 믿음이 되길 원했던 왕실의 바람은 오히려 제국을 파국으로 몰아 넣는다. 사상 탄압에 맞서 각지에서 반란이 속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라진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체위에 진정한 근대가 시작된다.